70년대 전통차력무술의 1인자, 전 김대중씨 경호팀장 최동섭씨

서울에서 체포돼 고문피해와 무장폭도 몰려 집안 풍비박산

5.18진압 주모자 전두환 전 대통령 상대로 15억 손해보상소송 준비

최동섭 회장 / (사)대한민국정우회

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그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소위 김대중일당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하고 폭도로 몰렸던 최동섭 씨(82. 안동 향우신문 발행인).

최씨는 당시 야당 정치인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호팀장으로 있다가 5.18 직전 체포돼 고초를 겪다가 풀려나 도피 생활을 하는 동안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한때는 전국 최고의 전통차력 일인자로 국내외 매스컴에 ‘한국의 헤라클레스’라 불리며 명성을 얻기도 했으나 하루아침에 오명을 쓰고 운동에서도 손을 떼야 했다. 당시 5.18 피해자 대부분이 명예회복과 피해보상도 받았지만 최 씨는 아무런 보상도, 명예회복도 이루지 못한 채 39년이 흘러간 것이다.

올해 들어 5.18 특별법 개정으로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진상규명이 시작되고 있어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다.

보수 정권 시절 국가배상소송을 냈으나 패소하였고 이번에는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조작을 주도한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불법감금, 허위사실공포,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등의 죄로 고소하고 손해배상도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젊은 시절 무예인으로 이름을 떨쳤고, 보통고시(요즘 7급 공시)에 합격하여 문무를 겸비한 공무원으로 더욱 화제를 모았던 최 씨.

이제 2급 지체 장애의 노쇠한 팔순 노인이 되어 39년 전의 악몽을 아직 떨쳐버리지 못한 듯했다.

“당시 신군부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권력을 잡기 위해 대학가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던 민주화 시위를 사회불안 조성과 정부전복 내란음모로 몰고 조작과 불법을 일삼았습니다.

신군부는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전날 밤 민주화 세력의 중심이었던 당시 야당 정치인 김대중 씨와 측근 인사, 서울지역 학생회 간부, 종교인, 교수 등 민주인사 26명을 전격 체포해서 내란 선동죄로 구속해버렸어요. 김대중 씨 동교동 자택에 박성철 경호실장과 제가 지키고 있었는데 15일 밤에 서울역에서의 대규모 시위의 상황을 파악하러 나갔다가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경찰에 체포돼 경호임무를 다하지못했습니다.”

서울역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자마자 경찰들이 몰려와“최동섭이 누구냐?” 며 다짜고짜 남대문경찰서로 끌려갔다고 한다.

최씨가 누군가? 70년대 태권도 6단에다 무쇠 같은 체력을 가진 차력 무술의 대가였다.

몸덩이만 한 바위를 맨손으로 깨부수고 활활 타는 불 속을 걸어가는가 하면 80명이나 태운 3.5톤 트럭을 쇠사슬을 감아 이빨로 10여 미터를 끌었던 괴력을 과시했다. 74년에는“체육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맨몸(복부)으로 총알을 받아내겠다”라며 내무부장관 앞으로 집회 허가를 요청해 각 일간 신문에 보도되었다.

맨몸으로 총알을 받고도 멀쩡할 수 있는 이치를 먼저 과학적으로 설명하라는 내무부의 요구로 무산되었지만 엄청난 화제를 뿌렸다. 최 씨는 그전에도 배에다 공기총을 쏘아 견뎌냈던 실험을 수십 차례 해와 거뭇거뭇한 자국이 아직 남아 있다.

그 무렵 최 씨는 KBS, MBC TV에 여러 차례 출연해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고 일본 후지TV, NHK, 미국 ABC 등의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해외 토픽감이 되기도 했다.

이런 괴력의 사나이가 버티고 있어 자칫 불상사가 일어날 것을 예상해서인지 전두환 신군부는 계엄확대 전날 김대중 씨 등에 대한 기습적인 체포 작전을 감행하기 직전에 먼저 최 씨를 체포하였다.

이런 낌새를 알 수 없었던 최 씨는 16일 서울역 시위현장에 나갔다가 붙들려 남대문경찰서에서 구류 20일을 살았다.

5.18 직전 폭풍전야의 비장감이 감돌던 동교동 거실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경호팀이 한자리에 모였다. 김 전 대통령 왼쪽이 최동섭 경호차장 최 씨. 오른쪽이 박성철 경호실장. 이 중 5명이 이미 고인이 되었다.

용산의 육군본부 지하 조사실에도 7일간 불려 다니며 잠을 못 자고 고문을 당해 지금도 다리를 절룩거린다. 현재 지체 장애 2급 장애인이다.

최씨가 유치장에 있는 사이 광주에서는 민주화 시위가 격화되자 신군부는 헬기 사격과 공수부대까지 동원하는 무자비한 유혈진압을 자행했다.

“구류에서 풀려나 동교동에 가보니 쑥대밭이 되었어요. 김 전 대통령과 많은 정치인, 종교인, 민주인사들이 내란음모죄로 체포되어 나중에 사형, 무기징역 등 중형에 처해지는 등 살벌한 정국이었습니다.”

가까스로 구금에서 풀려났지만,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숨죽이고 있던 최 씨 앞에 내란 선동 등의 죄목으로 기소한다는 소장이 날아온 것이다.

죄가 없다고 풀어줬던 사람을 다시 엄청난 죄목으로 구속하려 했던 것. 생명의 위협을 느낀 최 씨는 큰일 나겠다 싶어 경찰의 추적을 피해 젊은 시절 자신에게 차력 무술을 전수해준 청범도사가 머무르던 대전 인근의 산으로 들어갔다.

서너 달 뒤 잠잠 했을까 해서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최규하 대통령이 강제 퇴진 당하고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대통령이 되는 등 완전히 신군부 세상이 되어 있었다.

최 씨에게 추가 기소는 없었지만, 항상 경찰의 감시와 미행이 뒤따랐다. 그 무렵 최 씨에게 더욱 기막힐 일이 일어난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김대중 씨 등 민주화 세력의 사법 처리를 합리화하기 위해 제작·배포한 책자에 터무니없게도 자신이 조직폭력배의 두목으로 기재된 것을 발견한 것. ‘김대중 일당의 내란 음모사건 진상’이란 책자에는 그와 관련 아래와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5·18 이후 광주사태가 악화되자 김대중의 지원하에 있던 재경 조직폭력 깡패인 차창식(OB파 두목·김대중 본처 차용수의 셋째 동생) 최동섭(동섭 무술협회 두목) 등 깡패 40여 명은 광주로 내려가 데모군중 속에 3-4명씩 1개 조로 나누어 침투, 식칼 쇠파이프 등을 휘둘러 경찰 저지선을 돌파, 방송국과 파출소 등 공공기관을 파괴 및 방화하고 무기고를 습격, 광주사태를 무장 폭력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1994년 최 씨는 심기일전하여 안동향우신문사를 설립하고 언론인으로서 새 출발을 시작했다.

1997년에 자신이 모시던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더할 수 없는 기쁨과 큰 보람을 느꼈다.

서울 종로지역 영남향우회를 조직하고 영호남간의 지역감정을 해소하고 애향심을 심어주는 일에 팔을 걷고 나섰다.

자신이 주도하여 재경 안동향우회와 재경 고흥향우회가 자매결연을 하고 교류 방문 행사 등을 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서울시에 (사)대한민국정우회란 비영리단체를 등록하여 전국 8도민이 정을 나누며 지역 문화교류와 소통, 화합을 위한 친선활동을 벌이며 사회에 봉사하고 있다.

“38년 전의 가해자인 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 무력진압의 내란죄 등으로 무기징역을 받았다가 사면되었습니다.

이제 옛날 일로 다 잊어버렸지만 올바른 명예회복과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보상금이 나온다면 저처럼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고도 보상도 받지 못하는 민주화운동 피해자들과 가족들을 돕고 싶고요, 요즘 유약해진 청소년들에게 우리 전통 무예인 차력보급을 통해 정신통일의 중요성과 강인한 체력단련법을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39년이란 세월의 아픔은 깊게 패인 주름살처럼 남아 있다.

당시 함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켰던 박성철 경호실장은 고문 후유증으로 얼마 후 작고하였고, 산이라도 움직일 것 같았던 자신은 2급 지체 장애로 몸이 편치 못하다.

무엇보다 광주 무장폭도로 몰린 탓에 우리 전통 차력 무예를 전승, 보급하는 일을 하지 못했던 것이 평생의 한이 되었다.

최근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을 둘러싸고 정치권이 다툼을 거듭하는 모습을 보고 착잡한 심정이라는 최 씨. 당시 최고 책임자인 전두환 전 대통령이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고 광주시민과 전 국민에게 진정성 있는 사죄가 있어야 한다며 인터뷰를 끝마쳤다.

<최진호 기자>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