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없는 화가의 눈물 한바가지

 

전 정 남 개인전 9회[인사아트쎈타.라메르.조형갤러리.독일등], 국내외 150여회 전시참여,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입선, 삼성박물관 관장상, 과천 향토작가 우수상, 싱가폴, 홍콩, 일본 초대작가전, 양천구 도시디자인 자문위원, 전라남도 미술대전 심사cafe.daum.net/artchungsong , chungsongart@hanmail.net
전 정 남
개인전 9회[인사아트쎈타.라메르.조형갤러리.독일등], 국내외 150여회 전시참여,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입선, 삼성박물관 관장상, 과천 향토작가 우수상, 싱가폴, 홍콩, 일본 초대작가전, 양천구 도시디자인 자문위원, 전라남도 미술대전 심사cafe.daum.net/artchungsong , chungsongart@hanmail.net
가을이 어느새 안방까지 들어와 내 얼굴을 간지럽힌다.아니 내 손 끝과 발끝을 간지럽힌다.  바다로 산으로 지 필 묵 연 가지고 떠나자고 나의 현실은 창살 없는 감옥이고 앙꼬 없는 찐빵이나 다름없다. 화가는 그냥 작업실에서 그림만 그리고 전시하고 또 그리고 창작이란 불꽃을 태워야 하는데 나는 지금 어떠한가?

26년이라는 세월과 함께 먹물을 먹으며 산천을 누비며 살아 왔는데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아 난 갇혀버리고 말았다. 정직하고 너무나 평범한 남편을 만나 쥐꼬리 월급에서 또 더 작은 쥐꼬리를 떼어내 공부해 왔다.

그 흔한 명품하나 갖지 못하고 멋진 여행 한번 가지 않고 오직 창작활동에만 몰두해 왔는데 한계를 느끼며 주저앉을 상황이 나에게 오고 말았다. 하면 될 줄 알았다. 열정을 다하면서 그냥 하면 될 줄 알았다.

50세면 남편 먹여 살린다고 큰 소리 팡팡 치면서 그림에만 미치다시피 하면서 돈이라는 것은 그냥 생각도 않고 살아왔다. 남들은 돈을 벌 때 나는 창작활동 하는데 들어가는 돈은 아끼지 않고 퍼 부었다. 그리고 , 뒷바라지 하는 남편을 생각하면서 몇 배 더 노력하고 남이 그리지 않은 것을 그리려고 혼자서 섬으로 바다로 달려갔다.

목적이 있으니 혼자 가는 것도 무섭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피하며 파도와 바람과 조약돌과 교감하려 미친 듯 찾아 다녔다.

뭔가 느끼면 화실에 처박혀 밥도 먹지 않고 붓을 휘둘렀다.

아니 붓과 먹물을 함께 뿌렸다고나 할까 그 시간은 내가 아니고 바로 자연이 되어버린 것처럼 시간은 멈춰 버렸다. 내가 그림에 빠져 사니까 가정의 경제생활은 더욱 악화되고 이제는 남편도 지쳐서 포기상태에 와 있다. 그렇다.

내가 이제 가정을 꾸려 가야 하는데 뾰족한 수가 없다. 수강생 몇 명에 센터 강의 한다고 몇 푼이나 받을까? 그리고 , 난 가르치는 데는 별로 소질이 없다.

그냥 내 새로운 것을 시도 하면서 창작에만 몰두하고 싶었고 또 그렇게 해야만 진정한 화가일 것 같아서… 화곡역에 빈 사무실이 하나 있었다.

난 이제 내가 돈 좀 벌어보자 하고 인사동에 있는 전통 찻집이 생각나서 갤러리 차 집 겸 연구실을 꾸미기로 하고 없는 돈을 만들어 중고품으로 대충 꾸몄다.

지금도 내 꿈은 꽃들이 가득한 전통 찻집에서 지인들을 만나 맛있는 차 한 잔 하며 작품 감상하는 갤러리 갖는 게 꿈이다.

3개월만 해 보고 안 되면 식당으로 변경 한다고 남편과 약속을 했다.                            역시나 3개월을 해 보니 임대료만 내는 정도이고 집안의 도움은 하나도 없었다.

몸과 마음이 지친 남편이 이대로 가다가는 쪽박 차겠다면서 주방에서 죽을 각오로 음식 만들테니 나더러 작품생활 당분간 접고 홀 일을 책임 맡으라고 했다. 난 더 갈 곳도 피할 곳도 없어 3일 낮 밤을 울면서 결정을 해야만 했었다.

작품 활동 70%만 접고 식당 한 귀퉁이에 내 작업 할 공간만 만들어 주면 최선을 다 하겠다고 약속하고 다시 중고 식당기구로 바꾸는데 돈이 없어 보험 대출을 받아 시작했다.   종업원도 두지 않고 둘이서 정말 열심히 하다 보니 한분 오시면 다음 날 두 분이 오시고 또 다음 날은 세 분이 오시고 입소문이 나기 시작해 한 두달 지나니 금방 자리를 잡아 갔는데 나는 일에 적응하느라 몸살을 앓고 남편은 남편대로 약한 몸이 더욱 약해져만 가는 것 같아

처음으로 가슴을 치면서 돈 때문에 울어봤다. 나는 돈 때문에 울지 않고 살 것이라 믿었고작품생활을 하지 않고 살 것이라는 것은 생각도 안했기에 너무 많이 울었다.

손님들이 저것은 뭐냐고 물어 볼 때 내가 공부하는 화판입니다 하면 어떤 손님은 대단하다 칭찬 하시고 어떤 손님은 꼴에 무슨 그림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맛있게 잡수세요’

또 어떤 손님은 개인전이나 했냐? 어디 학원 나가냐? 미술대전 입선이나 했냐? 등등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관심이 있으니 물어 보실거라 생각하고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게 열심히 설명했다.

사람은 참 적응을 잘 하는 동물인 것 같다.                                                                   1년이 지나고 돈이라는 것이 손에 조금씩 들어오니까 남편도 건강해지고 단골손님도 나와 눈빛만 봐도 뭘 시키는지 알 것 같고 나도 30%로의 작품생활이 적응이 되어 마음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편안하다.

물론 꿈이 있기에 3년을 보냈고 길면 2년만 더 하자 생각을 하는데 남편이 주방 일 하는 것이 이제 벅차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도 더우면 더운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힘든 것을 알기에 미안한 따름이다.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면서 이만, 꿈이 있기에 연봉 없어도 행복하고 목적이 있기에 언제라도 도전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