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래 지체된 정의는 정의에 대해 거부하는 것과 같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부정된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의 (버밍햄 감옥에서의 편지)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명언을 꺼내기도 무참하리만큼 참으로 너무 오래 걸렸다.
청춘의 나이에 영문도 모른 채 일본으로 끌려가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몸과 마음이 병든 채 해방 조국에 귀국한 이래 일흔세 해가 흘렀다.
일본에서의 법정 싸움까지 포함하면 소송제기 21년, 국내 소송 기간만 따져도 13년이 걸렸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해당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이제야 나왔다. 늦어도 너무 늦었기에 소송을 낸 강제동원 피해자 4명 중 3명(여운책, 신천수, 김규수)은 “제사상 판결문”으로 받아보게 됐다. 이춘식 할아버지(94) 홀로 승소가 확정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할아버지는 강제징용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오랫동안 힘을 법정 싸움을 벌여온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사실을 이날에야 알았다. “같이 이렇게 살아서 봤더라면 마음이 안 아플 텐데 나 혼자라서 눈물 나고 슬프다” 할아버지의 오열이 “지연된 정의”의 책임을 아프게 묻고 있다.
사실 몇 해만 앞서 재판이 이뤄졌어도 한이 됐던 피멍울을 안은 채 징한 세상을 하직하는 참혹은 막을 수 있었을 터이다.
대법원 전원 합의체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을 인정해 “개인당 1억 원씩 배상하라”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의 모든 배상청구권이 소멸했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밝혔다.
이번 판결은 2005년 2월 처음 제기된 강제징용 손해배상 청구권 소송은 13년 만에야 마무리됐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피해자들이 받지 못한 임금이나 기타 재산적 손해에 따른 배상금을 청구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위자료를 청구한 것으로 판단했다.
위자료는 일본의 한반도 불법 지배와 그와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를 전제로 한 것으로 한일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판결은 2012년 5월 대법원 1부의 상고심 결론을 그대로 다른 것이다. 당시 대법원 1부도 한일 청구권 협정 협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한일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기 어렵다고 봤다. 대법원은 또 재판 관할권이 국내 법원에 있다는 점도 명확히 했다.
앞서 일본 최고재판소는 이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개인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우리 대법원은 “식민지배를 합법으로 보는 일본 법원의 판결은 효력이 없다”라고 봤다.
이번 판결로 피해자들이 실제 배상을 받을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지만, 일본의 불법 식민지배와 반인도적 행위에 대한 사법적인 단죄를 거듭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법원에서 벌인 소송은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사이 피해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일 수 없다. 특히 그 지체에 우리 사법부가 일조했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양승태 대법원은 2013년 8월 재상고 사건이 접수된 이후 재상고심을 5년간이나 늦췄다.
그 과정에선 외교 문제 비화를 우려한 청와대와의 협의도 있었기에 재판거래 의혹을 받는 것이다.
일본 외무성은 “한·일 우호 관계의 법적 기반을 바닥부터 뒤엎는 판결”이라며 주일 한국 대사를 불러들여 항의했다.
외교전쟁까지 불사할 태세다. 한·일 관계가 또 격랑에 휩싸였다. 정부는 사법부 판단을 존중하되 한·일간 신뢰를 다시 쌓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한·일 정상이 양국 미래를 놓고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