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향되지 않은 민족주의 바탕…남북지도자에 통일 서신
애국지사 김용중(金龍中 1898-1975)은 재미 한국인으로 한국의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민주화 운동가이자 언론인이다.
그는 일찍이 상해를 통해 미국으로 망명, 주로 언론을 통해 일제 때는 독립운동, 해방 후엔 중립화 통일운동을 일관되게 폈다.
그가 중립화통일론을 처음 주장한 것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분할점령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1946년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귀암 김용중 선생은 1898년 3월 2일 금산읍 중도리에서 태어났다.
식민지 조국에서 갈 길을 찾지 못했던 젊은 김용중은 18살 되던 1916년 상해로 건너갔고,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몽양 여운형을 만나면서 민족주의에 눈을 뜨게 된다.
귀암 김용중(金龍中) 선생
(1898~1975)
상해에서 1년을 보낸 뒤 1917년 미국에 있던 고향 선배 송철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뒤 1934년부터 1943년까지 9년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트레지노라는 곳에서 송철과 함께 ‘케이 앤드 에스 조버’라는 청과물도매상을 하면서 재력을 불려 나가며 하버드대학, 남가주대학, 조지워싱턴대학 등에서 수학했다.
그는‘학문 연마를 통해 실력을 양성한 후 이를 바탕으로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하라’는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의 권유를 받고 독립운동에 헌신할 역량을 쌓았다.
대학에 다니면서 그는 일제의 압제와 조선의 처지를 미국인에게 알리는 글을 미국신문에 기고했다. 하버드대학 시절인 1928년 7월 8일 ‘보스턴선데이’ 의견광고란에‘일본의 황금통치’라는 글을 영어로 일제의 학정을 고발했다.
일본은 최상의 도둑이 최고 시민이라는 이상을 필사적으로 실천했다.
그는 도산 안창호의 공립협회와 송석중의 대동보국회 등 미주에 산재한 25개 독립단체가 합쳐 나온‘대한인국민회’에 참여하게 된다.
대한인 국민회는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였다. 대한인 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고 중앙총회 아래 북미, 하와이, 멕시코, 시베리아, 만주 등지에 지방총회를 설치했다.
1909년 11월 22일 대한인 국민회의 기관지로 창간된 주간지 ‘신한민보’의 영문국장으로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기사를 쓰면서 언론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들은 모두 중부 캘리포니아의 리들리에 산다 하여 ‘리들리 그룹’이라 불렸다.
‘리들리 그룹’은 상해임시정부가 일본군에 쫓겨 중경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해외독립운동 단체를 직접 지도하지 못하게 되자 하와이·캘리포니아 일대 조선인 단체의 연합회를 구성, 그 임무를 맡으라는 지시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결성된 새로운 해외 독립운동 연합전선체인 ‘해외 한국연합위원회’의 중요한 역할을 떠맡았다. 김용중은 외교위원장을 맡았다.
한편 그는 워싱턴에 ‘조선문제연구소’를 설립 운영했다.
신안주보 주필로써 조국의 독립을 주장하고 세계에 홍보했다.
1943년 한국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17년간 “한국의 소리”를 발간해 조국의 독립을 역설했으며 수십차례에 걸쳐 독립자금을 헌납했다.
그는 1943년 3월 조선 실정을 소개하고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영자 월간지 ‘더 보이스 오브 코리아’를 창간하고 그 발행기관으로 조선 문제 연구소(THE KOREAN AFFAIRS INSTITUTE)를 설립과 동시에 라디오 방송국을 세워 하루에 3~4시간씩 방송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군사점령의 즉시 철폐를 요구하는 담화문이나 성명서를 냈다.
트루만 미국 대통령과 스탈린 소련 수상에게 “약소국이 정당한 이유 없이 고통 받을 수 없다”라며 남과 북으로 갈린 한반도 문제에 성의를 보이라고 촉구하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1961년 1월 14일과 19일 김용중은 김일성 수상이‘남북조선 연방제안을 제시한 것을 계기로 각각 남한의 장면 총리와 북한의 김일성 수상 앞으로 자신의 ‘중립화 통일방안을 담은 공개서한을 측근을 통해 보냈다.
그는 또 1964년 12월 12일과 1966년 11월 12일 자신의 중립화 통일방안을 더욱 발전시킨 제안을 남북한 수뇌들에게 다시 보내 통일논의를 촉구했다.
한편 그는 1919년 이래 광복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헌납했다.
광복 후에는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총회에 옵서버로 참가하기도 했으며, 중립화 통일방안을 제시하는 등 한국의 분단을 해소하고 통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평생의 대부분을 이국의 하늘 밑에서 보내면서도 끝까지 한국 국적을 지키며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살았던 김용중 선생은 1975년 9월 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남가주대학병원에서 78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그가 유언으로 남긴 말은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뼛가루를 조국의 38선에 뿌려 달라”는 것이었다.
귀암 김용중 선생은 미주 항일독립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로서 또한 독재에 항거한 민주투사로서 우리나라 현대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200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고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한반도와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평화운동가로 활동
내년 ‘학술회의, 통일음악회, 김용중 자서전’ 등 준비
올해는 3·1만세 항쟁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역사적으로 뜻 깊은 해이다.
평생을 미국에서 독립운동, 통일운동, 민주화운동에 헌신하신 우리 민족의 스승이요 선각자이신 애국지사 귀암 김용중 선생(1898~1975) 건국훈장 애족장의 생애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애국지사 귀암 김용중 선생의 기념사업회를 이끌고 있는 손녀 김성희 회장은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이 있는 것을 발견한 부친 김준오(교육자)는 7세에 김성희 회장을 피아노 교육에 입문시킨다.
김성희 기념사업회 회장
당시 우리나라에는 피아노가 없어서 미국에 계신 할아버지(김용중 선생)께 저는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어 대한민국을 빛내겠다는 어린 손녀 김성희의 편지를 받고 그랜드 피아노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주셔서 김성희 회장의 꿈은 이룰 수 있었다.
김 회장은 어머니 김영보 여사(국민훈장 모란장)가 설립한 충남 금산군 금산여자중·고등학교와 서울 숙명여자대학교와 경희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음악 교사로 재직 시 남편(임익빈)을 만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1974년 서울시 은평구 은평로 14(신사동)에 외동딸을 위해 예은유치원을 설립하고 유아 교육에 전념하고 있을 때 공직에 있던 남편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헌법(1975년) 비판 및 독재정권에 반기를 들어 강제해직은 물론 반정부 인사로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생명에도 위협을 받아 60세 되는 젊은 나이에 심근경색이라는 병을 얻어 운명했습니다.
남편 故 임익빈 선생은 경기고. 서울법대. 미국유학을 마치고 국영기업체 고위공직자로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였으나 불의를 용서하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임익빈 선생의 형님 故 임원빈 선생(건국훈장 애족장) 역시 경기중학교 학생회장의 신분으로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일경의 모진 전기고문으로 정신 착란을 일으켜 해방을 4개월 남겨 두고 안타깝게 서거했습니다.
두 아들(임원빈, 임익빈)은 수재로 시어머니박립비 여사의 자랑이자 가문의 영광이었는데 모두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받치고 가시밭길을 걷는 불운한 생을 마감하여 양가 모든 가족은 고난의 길을 걸었기에 부모님의 가슴에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김 회장은 남편(故 임익빈)의 생전의 업적을 정부에 제출하여 2012년 2월6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 위원회로부터 민주화 인사로 인정받았고 시아주버니 고 임원빈 선생(건국훈장 애족장)의 반정부인사 누명을 벗기고 서훈(명예회복)을 받아 시어머니의 한을 풀어 드렸습니다.
할아버지 김용중 선생 역시 친북인사로 고국에 돌아올 수 없어 김성희 회장은 남편 임익빈의 도움으로 사재를 털어 딸(고 임세연)과 함께 김용중 선생이 활동했던 미국으로 건너가 할아버지 모교인 하버드대학교와 컬럼비아 대학교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자료를 수집, 보훈처에 제공하여 200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아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해 드렸습니다.
이 모든 일은 아무도 해낼 수 없는 어려운 일로 여성은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실증을 보여준 실로 훌륭한 일을 하여 가문의 명예를 찾아 여성의 저력을 보여줬다.
내년 2020년은 6,25 전쟁이 일어난 지 70주년이며 귀암 김용중 선생 서거 45주년이 되는 해이다.
내가 죽으면 나를 화장하여 내 조국 38선 DMZ에 뿌려라, 내가 죽어서라도 수호신이 되어 조국과 민족을 지키겠다고 유언하셨다. 사람들은 김용중 선생이 손녀인 김성희 여사를 낳지 않았으면 어떻게 했을까 싶을 정도로 김 회장은 효손, 효녀, 효부로 효사상이 퇴색한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훌륭한 여성으로 칭송받고 있다.
모든 시련과 역경을 딛고 일어나 늦은 나이에 숭실대학교 통일정책대학원에 입학하여 국제정치와 북한문제를 전공한 김 회장은 애국지사의 후손과 분단민족의 여성으로 한반도 평화와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평화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은 6·25 전쟁이 일어난 지 70주년, 김용중 선생 서거 45주년 되는 해이다. 이에 김성희 회장은 ▲학술회의(김용중 선생의 생애와 사상)▲통일음악회 ▲김용중 자서전 준비 등으로 동분서주하고 있다.
많은 분들의 격려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