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세를 일기로 타계한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생전에 아시아적 가치를 주장했다.
1994년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이스에 실린 문화는 숙명이다.”는 인터뷰에서 리 전 총리는 아시아의 문화적 특성을 들어 “서구적 의미의 민주주의는 동아시아에 부적합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아ㆍ태 평화재단이사장이전 김대중 전 대통령은 8개월 같은 잡지에 “문화는 숙명인가?‘란 반박문을 싣고 정면 비판했다.
그는 아시아에도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철학적 전통이 있다면서 맹자의 왕도정치와 동학의 인내천 사상을 예로 들었다. 결론은 ‘아시아에서도 민주주의는 필연’이라는 것이었다.
리 전 총리의 독특한 ‘민주주의관은 그가 남긴 어록’에서도 드러난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민주주의는 신생 개발도상국에 좋은 정부를 가져다 주지 못한다’‘여론 조사나 인기투표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런 지도자는 약한 지도자다’‘언론의 자유는 싱가포르의 통합과 정부의 우선순위 아래 종속돼야 한다’등이 그것이다.
‘문제적 인물’ 리콴유는 이러한 신념으로 싱가포르를 번영하는 도시국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싱가포르 시민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2012년 미국 갤렵이 발표한 조사결과를 보면 세계 148개국 국민 중 행복감을 느끼는 비율에서 싱가포르는 꼴찌를 기록했다.
껌 씹는 일조차 간섭받는 나라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일은 쉽지 않을 터이다.
그는 31년간 세계 최장수 총리로 재임하며 싱가포르를 글로벌 금융과 물류의 허브로 탈바꿈시켜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안정을 이끌었다.
그가 신념처럼 추구했던‘개방의 힘’이 컸다. 그의 ‘싱가포르 모델’은 ‘박정희 모델’과 함께 권위적 자본주의를 대표한다.
그가 한국인에 대해‘강인하고 험난한 역경을 이겨내는 데 탁월한 힘을 지녔다’면서도 타협하지 않는 강성 노동조합과 고위층의 부패 척결 문제를 언급한 것을 보면 오늘날 한국이 겪는 상황까지 예견했던 거인의 혜안이 놀랍다.
효율적인 정부를 통해 고속성장과 깨끗한 사회라는‘두 마리 토끼’를 잡은 그의 리더쉽은 집권 3년 차 “부패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박근혜정부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총리 직속의 조사국을 만들어 부패를 끝까지 추적했고 측근 비리를 용납하지 않는 솔선수범을 했으며 공직자들에게 유혹해 넘어가지 않을 만큼 충분한 대우를 해 준 것이 성공 비결이다.
1990년대 싱가포르와 한국은 홍콩, 대만과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주목 받았다.
하지만 2009년 국민 소득에서 일본을 추월한 싱가포르와 딴판으로 한국은 국민소득 2만달러대에서 벗어나지 목하고 있다.
리 전 총리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카지노는 안 된다’고 했지만 장남 리센통 총리는 2005년에 입장을 180도 선회 해 세계적인 카지노 사업에 뛰어들었다. 글로벌 환경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실용주의는 동북아의 작은 반도국가인 우리에게도 귀감이 됨 직하다.
‘아시아적 가치’를 내세워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한 것이나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사회통제 등은 그가 남긴 그늘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리 전 총리의 국장에 참석했다. 박대통령이 해외 정상급 지도자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은 취임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박 대통령이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부터 리 전 총리와 인연을 맺어 온 점을 감안하면 이해 할만하다. 다만 걸리는 대목은 있다. 박 전 대통령 또한 유신을 선포하며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라는 기괴한 명분을 내세웠다.
배불리 먹는 일이 중요하고 그러려면 민주주의 같은 가치는 사치에 불과하다는 논리였다. 박대통령이 리 전 총리를 애도하며 ‘그때 그 시절’에 향수를 느끼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