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년, 이 순간 가장 참담한 것은 “통한의 반성문”밖에 쓸게 없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은 세월호 이전에도 이미 무능하고 병들어 있었다. 생명이 없는 돈을 위해 살아 숨 쉬는 생명을 버리는 업자, 집단 이익을 챙기며 공포의 이익은 외면한 관료, 무사안일에 빠진 정부, 리더쉽의 부제, 우리사회의 도덕지수는 최악이었다. 총체적으로 무능한 국가는 비스듬히 기운 상태에서서해안을 떠 다니던 세월호의 침몰을 막을 수 없었고 304명의 생명을 수장시키고 말았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불행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외면했던 적례를 직시하게 됐다.
기대 이하인 국가의 실력과 수준을 목도하며 정부, 정치권, 국민은 “세월호 이전”과 이후의 대한민국은 달라질 것“이라고 다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비장하게 ”국가개조를 약속했다. 세월호는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야 한다는 주문을 남겼다. 지난 1년간 우리는 이 과제를 얼마나 충실히 이행했을까! 박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 수습책으로 국가 조직 개편, 관피아 철폐 등 10대 개혁과제를 제시했다.
이에 따라 해경이 해체되고 국민안전처가 만들어졌고 세월호 3법도 만들어졌다. 정치권은 당리당략에 따라 세월호를 이용했고 때로는 희생자들을 적대시하며 갈등을 부추겼다.
“자식을 가슴에 묻는 것”이라며 유족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정치인들의 경박함이 릴레이 하듯 이어졌다. 우리 사회의 “공감능력”은 낮았다.
애덤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으로서의 정의를 “공감”이라고 했다. 공감은 차인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상대의 입장이 되어 그 감정을 자기 일처럼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개인의 삶에서든 공적 활동에서든 아무리 이상적 판단을 해야 할 때라도 공감을 바탕으로 한 도덕적 판만이 발휘돼야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희생자와 가족들의 슬픔에 공감하고 함께 상처를 치유하려고 노력하는 헌신적인 자원봉사자들은 진정한 시민정신이다.
세월호 참사는 결론적으로 누구 책임인가? 세월호 침몰은 탐욕스럽고 무책임한 누군가의 잘못으로 빚어진 사고다. 그 누군가를 특정하지 않으면 자칫 책임 회피가 될 수 있다.
세월호 선샤인 청해진해운의 실 소유자 유병언은 경찰의 추격을 피하다 변사하고, 이준석 선장은 1심에서 징역36년을 선고받은 뒤 항소심 선고를 기다리고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가 아직도 누구의 책임인지를 묻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잘못이 있음을 아프게 절감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놀랍도록 빠른 경제 성장을 이뤘지만 그 이면에 민관 유착과 안전 명시의 폐해를 낳았다.
지난 1년 동안 정부도 국민도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퇴직공직자의 취업 제한을 위해 공직자윤리법을 개정했다. 뇌물죄로 처벌하지 못하는 부정 청탁을 막기 위해 김영란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1년전보다 얼마나 국가 개조의 과제를 이뤘는지 묻는다면 누구도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
제도개혁과 함께 “좋은 게 좋은 것”“빨리 빨리”같은 속도와 성과에 집착한 안전불감증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를 격렬한 갈등의 시험대 위에 올려 놓았다. 세월호 특별법이 논란이 됐을 때 여야 정치권은 통합의 구실을 하지 못해 국회 무용론을 불러왔다.
“잠수함 충돌설” “국가정보원 개입설”등 괴담이 판쳤다.
“다이빙 벨”이라는 구조 기구를 둘러 싼 억지는 계속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국민 대부분은 건전한 상식으로 괴담과 억지를 물리쳐다. 세월호 1주년은 슬픔을 함께 나누고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발견하는 통합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
곳곳에 도사린 재난 무방비 지대를 고발하는 시민 감시 모임도 생겨나야 한다.